최봉석 인간문화재 소개

갈골과줄의 유래 및 역사

갈골 소식

갈골의 유래
갈골과줄의 역사
"한과최초 명인으로 인증받은 갈골과줄 최봉석 명인이 제23호 강원도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최봉석(崔鳳錫) 갈골과줄 기능보유자는 노동중리 현재의 터에서 16대째 5백년을 살고 있다. 2013년 4월 12일 강릉 갈골마을에서 집안대대로 과줄제조 기능을 이어와 2000년 한과최초 명인으로 인증 받은 갈골과줄 최봉석 명인이 강원도무형문화재 제23호로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현재 생가터인 강릉시 사천면 노동중리 446번지 청룡안 집터는 진사로 급제한 강릉최씨 희영공파 진사댁으로 최봉석 명인의 4대조인 최광철(1846~1884) 씨와 아내 풍천 임씨(1846~1914)로부터 현 주택에 거주하여 그 아들 최상하와 강릉 함씨에게 이어졌다.

1868년생인 최상하 씨는 최장희, 최진희, 최대희, 최명희 씨를 네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부인 강릉함씨(1864년생)와 함께 첫째 며느리인 최창규(1902~1980), 둘째 며느리 이원섭(1898~1994) 에게 과줄만드는 법을 전수하였다.

최봉석 명인의 직계조모인 최창규(1902년생) 할머니는 성산면 위촌리(우추리)에서 시집와 종가댁 종부로서 대소사를 이끌었으며, 작은댁 할머니 이원섭(1898년생) 과 함께 1920년대에는 모래과줄을 만들었다. 최봉석 명인댁에는 택호가 있었는데 ‘퇴일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것은 최창규 할머니가 살던 곳이 위촌리(우추리) 퇴일이라고 하여 시집와서도 그렇게 불렀고 이원섭 할머니는 ‘청냉이(청량리)집’이라고 불렀다.

노동리 과줄로 알려진 이원섭 할머니는 청냉이에서 시집와 과줄을 함께 만들어서 갈골한과의 명성을 이어나갔다. 이 할머니는 6.25동란 중에 남편을 잃고 생계가 어려워 과줄을 만들어서 주문진 시장도매집에 갖다 주었다고 한다. 이 할머니가 시집올 때 짐꾼에게 오색산자를 한 짐 지워왔다고 하는데 과거 강릉에서는 다섯 색을 넣어서 만든 산자가 있었다. 이원섭 할머니는 “과줄이 과자로는 상 우두머리였제. 푸시시 불어나는 과줄처럼 집안살림 불라고 잔칫상 가운데엔 무시로 과줄이 놓여 있었구마”라고 말했다.

"강릉갈골마을의 과줄의 역사는 180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생산되어 오늘날까지 전통이 계승되고 있다."

그러므로 강릉갈골마을의 과줄의 역사는 지금부터 150여년 전인 1800년대 중반부터 국내 최초로 지정된 한과명인이자 강원도무형문화재 23호로 지정된 최봉석(김주희 씨의 남편)씨의 4대조인 최상하씨와 부인 강릉함씨 로부터 시작되어 5대에 걸쳐 전승되었으며, 김주희 씨의 시할머니인 최창규, 이원섭 씨에 의해 1920년대부터 맛집으로 인기를 끌어 오늘날까지 전통이 계승되고 있다. 현재는 최봉석 보유자와 부인 김주희 여사, 그리고 아들 형준 씨가 6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최봉석 명인의 전승계보
"갈골과줄은 달콤한 먹거리로 대접받을 뿐 아니라 설이나 추석명절에는 따뜻한 정이 담긴 전통상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최봉석 보유자의 집안에서는 각종 대소사에 부조를 할 경우 전통적으로 과줄을 보낸다고 한다. 과거 술 거르는 도가집에서 술 한동이를 애경사에 부조하듯이 과줄만드는 집의 전통은 이와 같이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갈골과줄은 달콤한 먹거리로 대접받을 뿐 아니라 설이나 추석명절에는 따뜻한 정이 담긴 전통상품으로 각광받고 있고 혼상제례의 상차림에 빠지지 않고 있다. 강릉에서는 결혼식 때 음식을 전달하는 풍습으로 ‘질알금’이 있다. 이것은 사돈간 ‘길알림’으로 신부집에서는 신랑집에 한 접이나 두 접씩 맞추어서 보냈다.

결혼식 피로연 음식에도 과줄은 반드시 놓였다. 그것이 부풀어 오르기 때문에 신혼집의 재산이 부푼다는 의미로 빠트리지 않고 장만하였다. 또한 제사가 많은 집에서는 조과라 하여 과줄을 만들어 썼는데 보통 한 접에 백 개짜리를 세 접에서 다섯 접 까지 맞춘다고 한다. 갈골마을에서도 1960~70년대까지 십여 가구에서 과줄을 만들어서 대소사나 명절에 사용하였다. 그러나 만들기가 번거롭고 한 접 두 접 씩 시장에서 사다가 쓰는 집이 늘어나면서 갈골마을도 하나 둘 점차 사라졌다. 그러던 중 1980년부터 최봉석 보유자가 과거의 전통을 계승하여 활발하게 한과마을을 알리고 제품을 널리 홍보하면서 활성화되어 이제는 60여 가구로 늘어나고 있으며 경제적으로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강릉에서는 과거 30년 전에 식품허가가 받은 곳이 문암정에 있던 고려식품 등 두 곳이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뻥튀기 한과를 만들었다. 그러나 사천지역에서는 전통적으로 모래과줄을 만들다가 점차 콩기름으로 튀기는 기름과줄로 전향되면서 튀기기 쉽고 맛이 좋아졌다고 한다. 한때 강릉에서는 여러 색소를 넣은 ‘색밥과줄’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것은 다양한 색을 넣은 과줄로 밥을 쪄서 물감을 들여서 여러 가지 결혼식 때 괴울 때 색밥강정을 만들어서 썼다고 하며, ‘박산’이라 하여 쌀을 튀겨 조청을 발라 눌러서 썰어놓은 것도 있다. 갈골마을에서는 색밥과줄을 만들지 않으나 박산은 여러 지역에서 생산하고 있다.

"현대 갈골과줄은 전국화가 되고 세계에 나가있는 동포들에 의해 입소문이 나면서 국제화 길로 들어서고 있다."

최봉석 보유자에 의하면 한과 가운데 만들기 가장 어려운 것은 과줄이라고 한다. 일부에서 ‘과질’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탕을 밀가루로 반죽을 한 것이라 한다. 약과도 찹쌀과 밀가루가 있듯이 바탕을 밀가루로 한 것을 과질, 찹쌀로 한 것은 ‘과줄’이라고 부른다고 구분하였다.

과거 동해안 바다에서 고기가 많이 나면 강릉이나 주문진 부호집에서는 기름과줄을 즐겼다고 한다. 따라서 갈골마을에서 과줄을 주로 만들었어도 식품허가를 내지 않아 대관령을 넘지 못했으나 이제는 허가를 정식으로 얻음에 따라 전국으로 판매망이 늘어나 양적으로 크게 늘었다고 한다. 현재 과줄 판매망의 변화는 속초, 주문진, 강릉 등 강원도 영동지역을 목표로 맞춤으로 생산하다가 우편판매 등 전국화가 되고 세계에 나가있는 동포들에 의해 입소문이 나면서 국제화 길로 들어서고 있다.

강릉에서는 ‘남자가 한과를 만들면 사내구실 못한다’고 했는데 요즘의 갈골마을은 사정이 달라졌다. 남자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농사가 부업이고 과줄생산이 주업이 되고 있다. 이 마을은 과거 곡식 수매 때는 쌀 수매에 응하지 않는 마을로 알려질 정도로 직접 생산한 곡물로 과줄을 만들어서 내다 파는데 치중하였으며 그러한 전통이 오늘의 한과마을을 형성한 기층이 되었다. 강릉 풍습은 ‘예절의 서로 먼저 한다’고 하여 예의상선(禮義相先)이라 하였듯이 남보다 먼저 예법을 챙겼다. 그러므로 벼슬이 높거나 재력이 많아도 상호간 예법이 없으면 낮게 보았다. 이러한 전통예법을 강조한 강릉지역사회에서 전통음식인 과줄은 집안 간 각종 대소사에 예의를 갖추는데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다른 어떤 것보다 높고 신성한 음식의 반열에 놓였으니, 이것이 갈골한과의 격조 높은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 강릉원주대학교 장정룡 교수 논문에서 발췌 인용함